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글러스 맥아더/평가 (문단 편집) ==== 코코다 트랙 전투 ==== || [[파일:150818-740-3October1942-USGeneralMacArthur-SupremeCommanderBlamey-CommanderMJAllen_0.jpg|width=100%]] || 맥아더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한 뒤 1942년 4월 18일 남서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 부임했다. 그 후 그는 군을 재정비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다가 1942년 6월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하자 태평양 지역에서의 제한된 공세를 고려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먼저 공세를 개시해 1942년 7월에 뉴기니섬 동남부 해안의 부나에 상륙한 후 90여km를 진군해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려 했다. 미군 입장에서는 포트모르즈비를 잃게 되면 일본에 맞설 반격 교두보인 뉴기니섬을 잃게 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동해안이 일본 공군의 습격에 노출되기 때문에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군 측이 전투 병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있는 병력은 [[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되었고 해, 공군 역시 그쪽으로 파견되었다. 그래서 호주군이 주축이 되어 막아야 했는데, 그들은 기본 훈련은 이수했지만 정글 전투에 필요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맥아더의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지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현지 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초기에 병력을 배치할 때 "해당 지역으로 가면 작은 구렁텅이가 있으니 그곳에서 방어하라."고 지시했으나, 그 작은 구렁텅이는 사실 7마일이 넘는 계곡으로 밝혀져 현장에 도착한 부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맥아더는 아군 병력이 적보다 훨씬 많아 전황이 유리함에도 병사들이 무능하고 용기가 없어서 진격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져서 무리하게 진격을 독촉하기 일쑤였다. 급기야는 워싱턴에 무전을 보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병사들을 투지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을 아는 현지 지휘관들은 직접적인 공세만을 독촉하는 맥아더의 명령을 무시하고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여기에 일본군이 정글과 산악지대를 무리하게 돌파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음으로서 전세는 미군에게 유리해졌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영 좋지 못했다. 맥아더는 미군 지휘관이 이끄는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구성된 제32보병사단을 부나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군대는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민병대였다. 이후 부나-고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미군 지휘관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고집을 꺾지 않고 호주군 지휘관 로버트 L. 이체베르거 중장에게 "부나를 되찾지 못하면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는 살벌한 명령을 내렸다. 결국 1943년 1월 3일 부나를 되찾는데는 성공했지만,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사상자 수는 미군 사상자 1만 2291명(전사자 4684명), 호주군 사상자 2만여 명에 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